한반도 노비제도의 통시적 고찰
1. 서론
노비(奴婢)는 남자 종을 의미하는 ’노(奴)’와 여자 종을 의미하는 ’비(婢)’를 합친 용어로, 전근대 한반도 사회에서 국가나 개인에게 소유되어 재산으로 취급받던 최하층 천민(賤人) 계층을 지칭한다.1 이들은 단순한 하인이 아니라, 법적으로 매매, 상속, 증여의 대상이 되는 존재였다는 점에서 그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3
한반도의 노비제는 세계사적 보편성을 지닌 노예제와 구별되는 독특한 특성을 지닌다. 가장 큰 특징은 ’동족(同族) 예속’의 장기 지속성이다. 전쟁 포로나 다른 민족을 노예로 삼았던 수많은 세계사적 사례와 달리, 한반도에서는 동일한 민족 구성원을 세습적으로 예속시키는 제도가 19세기 말까지 공식적으로 유지되었다.5 이는 동시대 중국의 명나라가 전통적 노비제를 혁파하고 고공(雇工), 즉 머슴 제도로 전환하는 정책을 편 것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1
본 보고서는 고조선 시대의 단편적 기록에서부터 삼국, 고려, 조선을 거쳐 1894년 갑오개혁에 이르기까지 노비 제도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통시적으로 추적한다. 각 시대별 노비의 발생 원인, 법적·사회적 지위, 경제적 역할의 변화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제도 폐지 이후의 사회적 유산까지 고찰하여 한반도 노비제의 총체적 모습을 규명하고자 한다.
2. 노비 제도의 기원과 고대 국가의 예속민
2.1 고조선 사회와 노비의 발생
한반도 노비제의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조선의 범금 8조(犯禁八條)에서 발견된다.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그 집의 노비로 삼는다“는 조항은 노비 발생의 초기 형태가 전쟁 포로보다는 사회 내부의 범죄에 대한 형벌이었음을 시사한다.6 이는 사적 소유(私的所有) 관계를 기반으로 한 사노비(私奴婢)의 전통이 일찍부터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이다.6 8조법의 기록은 노비가 단순히 노동력을 제공하는 존재를 넘어, 범죄에 대한 징벌이자 사유재산을 보호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음을 암시한다.
2.2 부여, 고구려, 삼한의 예속민
부여, 고구려, 삼한 시대로 접어들면서 노비의 발생원은 더욱 다양해졌다. 부여와 고구려에서는 주로 사형수의 가족을 노비로 삼는 법규가 존재했는데 6, 이는 고조선의 절도죄와 달리 국가가 강력한 형벌권을 통해 노비를 양산하는 관노비(官奴婢) 전통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6 또한, 정복 전쟁이 활발해지면서 전쟁 포로를 노비화하는 관행이 보편화되었으며, 문헌에 등장하는 ’노복(奴僕)’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포로 노비를 지칭했던 것으로 받아들여진다.6
이 시기 기록에 등장하는 ’하호(下戶)’는 노비와는 구별되는 계층이었다. 하호는 피정복지의 공동체를 그대로 유지한 채 국가에 공납의 의무를 지는 예속민으로, 완전한 예속민인 노비와 자유민인 민(民)의 중간적 성격을 지녔다.6
삼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신분적 차별은 율령 반포를 통해 더욱 강력한 법적 구속력을 갖게 되었다.7 노비는 왕실, 귀족, 관청에 예속된 최하층 천민으로 명확히 규정되었고 7, 부채(負債)를 갚지 못해 자식을 노비로 삼거나 7, 남의 가축을 죽이는 등의 행위로도 노비가 될 수 있었다.7 이는 국가 체제가 정비되면서 노비의 발생 경로가 제도화되고 다양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초기 역사의 흐름은 한반도 노비제의 성격 변화를 명확히 보여준다. 고조선에서 절도라는 내부 범죄를 노비화의 원인으로 삼았던 것은 사회 내부의 규범을 강화하고 공동체 질서를 유지하려는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부여, 고구려 시대에 사형수 가족 몰수나 전쟁 포획이 주된 원인으로 부상한 것은 국가 권력의 강화와 대외 정복 활동의 산물이었다. 즉, 한반도 노비제의 초기 발생 동인은 ’사적 재산 보호와 공동체 질서 유지’라는 내부적 필요에서 출발했으나, 고대 국가가 형성되고 발전하면서 노비는 ’국가 형벌권의 집행 대상’이자 ’정복 전쟁의 전리품’으로서 국가가 통제하고 활용하는 인적 자원으로 그 성격이 전환되었다. 이 초기 전환 과정은 이후 노비가 국가 소유의 ’공노비’와 개인 소유의 ’사노비’로 분화되는 제도적 토대를 마련했으며, 노비가 단순한 노동력을 넘어 국가 통치와 지배층의 권력 유지에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 잡게 되는 역사적 경로를 예고했다.
3. 고려시대 노비제의 법제화와 사회적 지위
3.1 지배층의 핵심 경제 기반
고려시대에 노비는 토지와 함께 지배층의 부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물적 기반이었다.8 노비는 그 자체로 중요한 재산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배층은 노비 노동력을 활용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정당문학 벼슬을 지낸 안목(安牧) 가문은 수만 경(頃)의 토지와 100여 호에 달하는 노비를 소유했는데, 1호당 5명으로 계산해도 500명이 넘는 규모이다. 이들은 대규모 개간과 농장 경영의 핵심 노동력이었다.8
3.2 노비 소유권 강화를 위한 법제 확립
고려 정부는 지배층이 노비를 안정적으로 소유하고 확대할 수 있도록 법제를 정비했다. 986년(성종 5)에는 노(奴)는 포 100필, 비(婢)는 포 120필로 가격을 정하는 법을 제정했다.9 이는 노비가 인격체가 아닌 명확한 ’재산’임을 국가가 공인한 최초의 노예법이었다. 비(婢)의 가격이 더 높았던 것은 자녀 생산을 통한 노비 증식의 가능성을 경제적으로 더 높게 평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11
1039년(정종 5)에는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을 제정했다.9 이는 주인이 다른 노와 비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의 소유권이 비(婢)의 주인에게 귀속된다는 원칙으로, 노비 소유주 간의 분쟁을 예방하고 여성 노비를 통한 재산 증식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핵심 장치였다.8 이와 함께 부모 중 한쪽만 노비여도 그 자식은 노비가 되는 일천즉천(一賤則賤) 원칙이 적용되었다.5 이는 양인과 천민의 혼인(良賤交婚)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억제함으로써, 지배층의 노비 인력풀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확대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8
3.3 고려 노비의 특수성과 사회적 지위
고려 노비는 법적으로는 재산이었지만, 조선시대와 비교할 때 몇 가지 특수한 점이 있었다. 첫째, 인구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일부 연구에 따르면 고려시대 노비 인구는 전체의 5%에서 10% 내외로 추정되며, 인구의 30~40%에 달했던 조선 후기와 비교할 때 그 비중이 현저히 낮았다.9 이는 고려 사회의 주된 생산 담당자가 노비가 아닌 국가의 토지를 경작하는 양인 농민이었음을 시사한다.9
둘째, 주인과의 신분율(身分律)이 상대적으로 느슨했고 사회적 인격이 비교적 살아있었다.13 처의 주인을 살해한 비부(婢夫)가 조선시대라면 예외 없이 참형에 처해졌을 중죄임에도 유배형에 그친 사례나, 주인의 범죄를 관청에 고발한 노(奴)의 사례는 고려 노비의 법적 지위가 조선만큼 절대적으로 예속되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9 복식이나 이름에서 ’사회적 죽음’을 나타내는 강제적 상징이 약했고, 만적(萬積), 덕적(德積) 등 불교적 의미를 담은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9
셋째, 신분 상승의 가능성이 존재했다. 특히 무신집권기에는 사회 질서가 급격히 변동하면서 이의민(李義旼)처럼 노비 출신이 최고 권력자가 되는 파격적인 사례가 등장했다.9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198년, 개경의 사노 만적(萬積)은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찌 씨가 따로 있으랴“를 외치며 신분 해방을 위한 대규모 반란을 모의했다.9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이는 고려 노비들이 극심한 차별 속에서도 신분적 한계를 타파하려는 강한 저항 의식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고려시대에는 총 10회의 노비 반란이 기록된 반면, 조선시대에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는 점은 두 시대 노비의 처지와 의식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9
고려 노비제는 이처럼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한편에서는 노비를 재산으로 규정하고 세습 원칙을 강화하는 등 법적 예속을 심화시키는 조치가 취해졌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노비의 인구 비중이 낮고 처벌이 상대적으로 관대했으며, 심지어 최고 권력층으로의 신분 상승 사례와 그에 자극받은 대규모 반란이 발생했다. 이 모순적인 현상은 고려 사회의 구조적 특징에서 기인한다. 고려는 귀족 중심 사회였지만, 무신정변과 같은 급격한 정치 변동은 기존 질서를 흔들어 신분 상승의 기회를 제공했다. 또한, 노비 인구 비중이 낮았다는 것은 사회 전체가 노비 노동력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구조가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국가는 노비 소유권을 법적으로는 보장하여 지배층의 경제 기반을 지지하면서도, 사회 전반의 통제력이나 신분율은 조선만큼 경직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고려 노비제는 ’재산’으로서의 노예적 성격과 ’인격체’로서의 사회적 지위가 불안정하게 공존하는 과도기적 형태를 띠었으며, 이러한 이중성과 내재된 유동성이 만적의 난과 같은 저항 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역설적으로 이는 이후 조선 왕조가 더욱 강력하고 체계적인 신분 통제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는 역사적 반면교사가 되었다.
4. 조선시대 노비제의 확립과 심화
4.1 노비 인구의 폭증과 신분 세습법 논쟁
고려 말 10% 미만이었던 노비 인구는 조선시대를 거치며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17세기에는 전체 인구의 30~40%에 달할 정도였다.5 이러한 인구 폭증의 가장 큰 원인은 양천교혼(良賤交婚), 즉 양인과 천민 간의 혼인이 활발해진 상황에서 가혹한 신분 세습법이 적용되었기 때문이다.5
노비 신분 세습을 둘러싼 법제는 국왕과 사대부의 이해관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했다. 국왕과 국가의 입장에서는 조세와 군역을 부담하는 양인을 한 명이라도 더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따라서 양인 남성과 노비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아버지의 신분에 따라 양인으로 만드는 종부법(從父法)을 선호했다. 태종이 이러한 정책을 편 것이 대표적이다.5 반면, 사대부 지배층은 사유재산인 노비를 늘리기 위해 부모 중 한쪽만 노비여도 그 자녀가 무조건 노비가 되는 일천즉천(一賤則賤) 원칙을 고수하려 했다.5
이러한 첨예한 대립 속에서 법제는 종부법(태종)에서 일천즉천(성종, 『경국대전』 법제화)으로, 다시 종모법(從母法, 현종-영조)으로 변천했다.5 1731년 영조 때 최종적으로 확정된 노비종모법은 어머니가 양인이면 자녀도 양인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으나, 반대로 어머니가 노비이면 아버지가 양인이라도 자녀는 노비가 되는 세습의 굴레를 유지했다.17
4.2 노비의 법적 지위: ‘말하는 재산’
조선시대 노비는 법적으로 ’사람’이면서 동시에 ’재산’이라는 모순적인 지위에 있었다. 이들은 토지와 함께 상속, 매매, 증여의 대상이 되는 명백한 재산이었다.3 퇴계 이황이 5명의 자녀에게 총 367명의 노비를 상속한 사례나 20, 빚 때문에 자신과 처첩을 노비로 파는 내용이 담긴 문서 21 등은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조선 초 민사소송의 대부분이 노비의 소유권을 둘러싼 ’노비 소송’일 정도였다.21
주인은 노비에 대해 절대적인 통제권을 가졌다. 주인은 노비를 사적으로 처벌할 권한(私刑權)을 가졌으며, 법에 의거해 형벌을 가하다가 우연히 죽게 만들어도 죄를 묻지 않았다.17 또한 ’불고율(不告律)’에 따라 노비는 모반대역죄와 같은 국가적 중대 범죄가 아닌 이상 주인의 불법 행위를 관청에 고발할 수 없었고, 이를 어길 시 교살에 처해졌다.17 이는 주인과 노비의 관계를 군신(君臣), 부자(父子)와 같은 강상(綱常)의 관계로 규정하여 주인의 지배를 이념적으로 절대화한 것이다.22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비는 완전한 ’물건(chattel)’은 아니었다. 국가는 주인이 관청에 알리지 않고 임의로 노비를 살해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이를 위반한 주인은 처벌받았다.22 또한 세종 대에는 여종에게 100일의 출산휴가를, 그 남편에게 30일의 휴가를 주도록 규정하기도 했다.19 이는 노비가 국가의 백성이자 노동력 재생산의 주체임을 인정하는 최소한의 조치였으며, 노비의 소유권이 국가의 공권력에 의해 일정 부분 제한받았음을 보여준다.
4.3 노비의 다양한 유형과 경제적 역할
조선시대 노비는 소유 주체에 따라 국가나 관청에 소속된 공노비(公奴婢)와 개인에게 소속된 사노비(私奴婢)로 나뉘었다.12 또한 거주 형태와 예속 방식에 따라 솔거노비(率居奴婢)와 외거노비(外居奴婢)로 구분되었는데, 이 둘의 삶은 매우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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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거노비: 주인집에 함께 살면서 직접 노동력을 제공하는 형태로, 가사노동, 농경 등 주인의 직접적인 지휘와 감시하에 있었다.4 이들은 독자적인 가정을 꾸리거나 재산을 소유하기가 거의 불가능했고, 생사여탈권이 주인의 손에 달려있어 가장 예속의 정도가 심했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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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거노비: 주인과 따로 살면서 독립적인 가정을 이루고, 주인에게 정해진 액수의 신공(身貢, 옷감이나 곡식 등 현물)을 바치는 형태로, 전체 노비 중 다수를 차지했다.16 이들은 비교적 자율적인 경제 활동이 가능하여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고,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거나 심지어 다른 노비를 소유하는 경우도 있었다.17 그러나 이들의 재산과 신분은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아 주인의 자의에 따라 언제든 박탈될 수 있는 불안정한 상태였다.16
표 1: 조선시대 노비 유형별 특징 비교
| 구분 | 소유 주체 | 거주 형태 | 주된 의무 | 재산 소유 | 자율성 |
|---|---|---|---|---|---|
| 공노비 | 국가, 관청 | 관아 내 거주 또는 외거 | 입역(노동력 제공) 또는 신공(현물 납부) | 제한적 가능 | 사노비에 비해 상대적 높음 |
| 사노비 | 개인(양반 등) | 주인집 거주(솔거) 또는 외거 | 주인의 명령에 따른 노동력 제공 또는 신공 | 소유주에 따라 상이 | 소유주에 따라 상이 |
| 솔거노비 | 개인 | 주인집에 동거 | 가사, 농경 등 직접 노동력 제공 | 거의 불가능 | 매우 낮음 (노예에 근접) |
| 외거노비 | 개인 또는 국가 | 독립 가구 형성 | 신공(현물) 납부 | 가능 (토지, 노비 소유 사례 존재) | 상대적으로 높음 (농노에 근접) |
4.4 학술적 쟁점: 노예(Slave)인가, 농노(Serf)인가?
조선시대 노비의 성격을 두고 학계에서는 ’노예’로 보아야 하는지, ’농노’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김석형을 비롯한 일부 연구자들은 조선 초기 노비의 절대다수를 차지한 외거노비가 주인에게 신공을 바치고 토지에 기반하여 생활했다는 점에서, 이들을 토지에 묶인 유럽의 ’농노(serf)’와 유사한 존재로 규정한다.24
반면 이영훈 등은 외거노비가 특정 토지에 결합되지 않았고, 솔거노비와 외거노비 간의 이동이 빈번했다는 점을 들어 농노설을 비판한다.24 또한 노비가 매매·상속의 대상이 되는 ’재산’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인격이 부정된 ’노예(slave)’적 성격이 그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종합적으로 볼 때, 조선의 노비는 하나의 개념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복합적 존재였다. 주인에게 인신이 완전히 예속된 솔거노비는 ’노예’에 가까웠고, 다수의 외거노비는 독자적 경제생활을 영위했다는 점에서 ’농노’와 유사한 측면을 가졌다.19 따라서 조선의 노비제는 노예제와 농노제의 특징을 모두 포함하는 독특한 형태의 예속 제도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 특히 다수의 노비가 주인과 떨어져 사는 외거노비였다는 사실은 체제 자체에 구조적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노비는 법적으로 재산인데, 그 ’재산’이 또 다른 재산을 소유하고 경제 활동을 영위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는 ’소유되는 주체’와 ’소유하는 주체’라는 모순된 정체성을 한 개인에게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제적 자율성은 필연적으로 신분적 예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욕구를 낳았다. 재산을 축적한 외거노비들은 납속(納粟, 곡식을 바치고 면천)이나 군공(軍功) 등 합법적 신분 상승의 가장 유력한 후보군이 되었다.27 세조 때 쌀 100가마니를 바치고 면천을 신청한 노비가 너무 많아 제도를 중단한 사례는 이들의 경제력을 잘 보여준다.19 결국, 지배층이 노동력 착취의 효율성을 위해 고안한 ‘외거노비’ 제도는 역설적으로 노비 계층 내부에서 경제력을 바탕으로 신분제에 도전하는 세력을 성장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이들은 조선 후기 신분제 동요의 핵심적인 내부 요인으로 작용했으며, 국가가 재정 위기 시 납속면천 정책을 시행할 때 가장 먼저 호응하여 스스로의 족쇄를 끊어내는 주체로 기능했다. 즉, 노비제 시스템 자체가 자신의 해체를 촉진하는 모순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5. 노비제의 동요와 해체
5.1 조선 후기 사회 변동과 노비제의 균열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견고했던 노비제는 여러 측면에서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대규모 전쟁은 기존의 신분 질서를 뿌리부터 뒤흔들었다. 노비들은 적군의 목을 베는 등 군공(軍功)을 세워 면천되거나 27, 전쟁의 혼란을 틈타 도망하여 새로운 곳에서 양인 행세를 하는 등 16 적극적으로 신분 해방을 모색했다.
동시에 상품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부를 축적한 외거노비들이 대거 등장했다.19 이들은 국가 재정이 악화될 때마다 시행된 납속책(納粟策), 즉 국가에 곡식을 바치고 합법적으로 양인 신분을 획득하는 제도를 적극 활용했다.27 임진왜란 이후에는 그 문턱이 크게 낮아져 쌀 15석, 심지어 2석만 내고도 상민이 될 수 있었다.27 산업의 발달로 도망친 노비들이 임노동자, 머슴, 행상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노비의 도망은 일상적인 현상이 되었다.16
5.2 국가 정책의 전환
이러한 사회 변화에 대응하여 국가 정책 또한 전환되기 시작했다. 1731년(영조 7), 영조는 사대부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노비종모법을 확정했다.18 이는 양인 여성과 노비 남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어머니를 따라 양인이 되도록 법제화한 것으로, 양인 수를 늘려 국가 재정과 군역 자원을 확보하려는 국가의 의지가 반영된 조치였다. 이 법은 노비 세습의 고리를 일부 끊는 획기적인 개혁으로 평가된다.5
결정적인 변화는 1801년(순조 1)에 일어났다. 순조는 중앙 관서에 소속된 6만 6천여 명의 공노비를 해방하고 관련 노비 문서를 소각하는 조치를 단행했다.15 이는 국가가 더 이상 공노비 제도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인정한 상징적 조치였으나, 여전히 개인 소유의 사노비는 존속한다는 한계를 가졌다.
5.3 갑오개혁(1894년)과 법제적 폐지
노비제의 완전한 법적 폐지는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개혁의 배경에는 조선 후기부터 지속된 신분제의 내부적 동요 32, 동학농민운동 과정에서 분출된 “반상의 등급을 없애고 인재를 등용하라“는 강력한 평등 요구 33, 그리고 서구 문물을 접한 개화파의 근대 국가 수립 의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1894년 6월 28일, 개혁 추진 기구였던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는 의안을 통해 “공사노비에 관한 법을 일체 혁파하고 사람을 사고파는 일을 금지한다“는 조항을 통과시켰다.33 이로써 고조선 이래 수천 년간 한반도 사회의 근간을 이루었던 노비 제도는 법적으로 완전히 종식되었다.15 이 개혁은 문벌 타파, 연좌제 폐지, 과부의 재가 허용 등 다른 봉건적 악습의 철폐와 함께 이루어져 사회 전반의 근대적 전환을 목표로 했다.37
노비제의 폐지는 단순히 갑오개혁 시기 소수 개화파의 결단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두 가지 거대한 동력이 결합되어 있었다. 하나는 수백 년에 걸쳐 진행된 노비들 스스로의 도망, 납속, 군공 등 신분 상승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 즉 ’아래로부터의 저항’이다.16 다른 하나는 국가가 노비의 증가가 양인 감소로 이어져 통치 기반을 약화시킨다는 모순을 인지하고, 재정 및 군역 자원 확보를 위해 종모법을 시행하고 공노비를 해방하는 등 점진적으로 제도를 수정해 온 ’위로부터의 필요’이다.5 1894년 갑오개혁의 노비제 폐지 조항은 이처럼 장기적인 ’내부적 동요’와 ’국가적 필요’가 동학농민운동이라는 결정적 계기를 만나 폭발적으로 결합한 결과물이었다. 이는 노비제 폐지가 단발성 사건이 아니라, 조선 사회 내부에서 오랫동안 축적된 변화의 에너지가 임계점에 도달하여 제도적 변혁으로 이어진 필연적 과정이었음을 의미한다.
6. 결론
한반도의 노비제는 고대 사회의 형벌 및 전쟁 포로에서 기원하여, 고려시대에 법제화되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인구의 30~40%를 차지할 정도로 팽창하며 사회·경제 구조의 핵심을 이룬 특수한 예속 제도였다. 특히 동일 민족을 세습적으로 예속시켰다는 점, 그리고 ’재산’이면서도 제한적 ’인격’을 인정받고 독자적 경제 활동을 영위하는 외거노비가 다수 존재했다는 복합적 성격이 그 특징이다.
법적 해방이 곧바로 사회적 평등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법적 신분은 사라졌지만, 경제적으로 자립할 기반이 없었던 대다수의 옛 노비들은 ’머슴’이라는 이름으로 옛 주인에게 재예속되는 경우가 많았다.16 이들은 낮은 보수와 사회적 낙인 속에서 노비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차별적 대우를 받았다.16 실제로 노비와 함께 천민의 대명사였던 백정(白丁) 신분이 갑오개혁으로 해방된 후에도 극심한 사회적 차별을 겪어, 1920년대에 이르러 ’형평운동’이라는 별도의 신분 해방 운동을 전개해야 했던 사례는 법적 폐지 이후에도 뿌리 깊은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를 명확히 보여준다.39 또한, 노비제 폐지 이후 성(姓)이 없던 이들이 주인의 성을 따르거나 흔한 성씨로 편입되면서, 특정 성씨에 인구가 집중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17
수천 년간 이어진 신분제 사회의 유산은 법적 제도가 사라진 현대 한국 사회에도 무형의 형태로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개인의 사회적 지위가 노력보다 부모의 경제적 배경에 따라 결정된다는 ’수저계급론’의 확산은 40, 과거 혈통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던 신분제적 사고의 현대적 변용으로 볼 수 있다.43 교육과 부의 대물림을 통해 사회 계층이 고착화되는 현상은 40 ’개천에서 용 난다’는 사회적 역동성을 약화시키며, 이는 과거 신분 상승이 극도로 어려웠던 시대의 구조적 한계를 연상시킨다.43 권력이나 부를 이용한 소위 ‘갑질’ 문화 역시 41 인간을 서열화하고 상대를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는 전근대적 신분 의식의 잔재로 해석될 수 있다. 결국, 한반도 노비제의 역사는 법적 평등을 넘어 실질적 평등을 이루기 위한 사회적, 문화적 과제가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있음을 시사한다.
7. 참고 자료
- 조선시대 노예제도로 본 21세기 권력·자본의 노예 - 헤드라인뉴스(HeadlineNews), https://www.iheadlin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656
- 노비 - 우리역사넷,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tg/view.do?subjectCode=tg_ty_010&tabId=02&levelId=tg_003_0140&ganada=&pageUnit=10
- 천인 - 우리역사넷,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tg/view.do?subjectCode=tg_ty_010&tabId=02&levelId=tg_003_0640&ganada=&pageUnit=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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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인구 40%가 노비라는데···노비는 ’노예’와 다를까 - 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812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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